정소현「너를 닮은 사람」& 이주란「넌 쉽게 말했지만」
오늘 리뷰할 책은
정소현 「너를 닮은 사람」과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이다.
책에서 등장하는 두 여성은
과거 사회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다.
하지만 두 주인공은 서로 전혀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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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더욱이 그것이 자기 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여기 두 명의 여자가 있다. 한 명은 2012년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한 명은 2019년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두 여자는 서로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먼저 정소현 「너를 닮은 사람」에서는 나의 잔잔한 우물에 하나의 돌을 던지는 사건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과거 가난하고 불행한 집안에서 태어나 불행한 삶을 살았다. 이런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결혼밖에 없다고 생각해 사랑보다는 돈을 좇아 결혼했고 아이 두 명과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 내 딸에게 폭행을 저질렀던 가해자인 클라인이 우리 집에 찾아왔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녀를 집에 들인다. 그 후 나는 처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클라인이 집에 찾아와 사과할 때마다 나는 이유 모를 죄책감에 시달렸고, 과거 클라인의 남자친구인 유석과 나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 이야기 속에 드러난 한 여성의 욕망과 그 욕망으로 인해 미쳐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2012년, 이제 곧 10년 전이지만 여성의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거의 바닥에 가까웠다. 과거 여성은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도 결혼과 출산 때문에 일자리를 찾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어렵게 찾은 일자리에서도 남자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고 일했다. 그리고 결혼이나 출산을 하면 당연히 회사를 그만둬야 했고, 집에서 집안일을 해야 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꿀 기회라고는 ‘시집’이 전부였고, 그래서 ‘취집’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였다. 「너를 닮은 사람」에 등장하는 성공 욕망에 미쳐 살인까지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를 만든 것은 그녀 자신도 아니고 그녀 부모님도 아니다. 바로 그녀가 살아왔던 환경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바르게 보지 못했다. 아니, 바르게 보려고 하지 않았다. 리사가 클라인에게 폭행을 당했을 때 클라인을 단순히 “그저 너를 많이 닮은 사람인 것을 확신하고 안심(79쪽)”한 것도 과거 자신의 잘못을 덮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난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배우려는 당신이 젊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나이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앞으로도 절대 철들지 않을 거라고 말했죠? 내가 그때의 당신보다 더 나이를 먹고 보니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요. 철드는 게 나쁘거나 대단한 게 아니에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당신은 그냥 자기 연민에 빠진 철부지였고. 당신 뜻대로 쉰이 넘은 지금까지 여전히 철이 안 든 것 같네요. 나는 당신을 경멸합니다."(111쪽)
그녀가 자신의 성공 욕망을 펼치지 못했던 시간의 결핍이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클라인’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고 그녀는 자신이 과거 그런 환경에서 자라 왔다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기 바빴다. 지나간 일을 들추는 것을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고 인생 자체가 자신의 안정된 삶을 무너뜨리는 것에 있어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클라인은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사과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녀는 사과는커녕 클라인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고도 클라인을 자신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나오는 ‘환영’이라고 생각할 뿐 아직도 자기 연민 속에서 나오지 못한 채로 이야기는 끝난다. 하지만 소설이 “사람들은 바퀴 밑에서 너를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너는 그 자리에(113쪽)”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 나는 아직 자신을 20대 불쌍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은 것 같고, 자기 연민 속에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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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에 살아가는 2019년의 여자를 만나보려 한다. 이 소설은 앞의 소설과는 다르게 너무나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지금까지 여러 다양한 소설들을 읽어봤지만, 이 정도로 사건이 없는 소설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한다면 서울 생활에 지쳐 “가끔 실수할 때를 제외하곤 우리 집이라고 말하지 않고 엄마 집이라고 말하(54쪽)”는 고향 집에 내려와 있는 것이 전부이다. 마치 현대인들이 일부러 돈을 들여 제주에서 한 달 살기 하면서 겪을 만한 일을 주인공은 고향 집에서 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주인공이 왜 서울 생활에 지쳤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나오기는커녕 주인공은 자몽청을 만들고, 옥수수를 판매하시는 아주머니가 나오셨는지 궁금해하고, 엄마와 산책갔다가 미나리를 캐고, 놀이터에서 슬라임인지 액괴인지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에게 사탕은 못주지만(아이들이 당뇨 걸린다고 거절한다) 마이쮸는 줄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
"서울에서 짐을 정리할 즈음엔 맛없기가 힘든 간단한 음식도 이상하게 죄다 망쳐버렸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없어서였을까. 생계를 위한 일을 하거나 우는 시간을 빼고 나면 내게 남는 시간은 별로 없었다. (중략) 나도 더 가난해지고 싶진 않았지만…… 마지막엔 정말이지 뛰어내리고 싶었다."
"너 1.5층 살았잖아." (79쪽)
아직도 대학은 어디로 갔는지, 취직은 했는지,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 등 너무 남의 생활에 관심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 살다 보니 나도 이 소설을 읽는 순간조차 나는 주인공의 성별을 파악하려 했고, 주인공이 어떤 직업에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하지만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나 순탄한 일상의 소설이 끝났을 때 너무 머릿속에 남는 게 없어서(내가 잘못 읽은 줄 알고) 다시 읽으려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마치 암울한 과거에 대해 말하는 주인공에게 “너 1.5층 살았잖아. (79쪽)”라며 무심하게 응수하는 엄마의 태도가 소설이 현대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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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주인공의 직업을 모르고 성별도 모르고 사건이 없어도 “아 이 소설은 그냥 이런 소설이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고, 체리인지 채리인지, 후미인지 흐미인지, 지유와 지우에게 줄 초콜릿을 담배 사달라고 부탁한 청소년들에게 주는 주인공처럼 가끔은 대충 살아도 된다고 소설은 말한다. 주인공의 이런 무덤덤한 태도에 글을 쓰는 지금도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어쩌면 작가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피식하고 한 번 입꼬리를 올리는 것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힘든 일을 한 번도 겪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없다. 그때는 세상이 정말 무너질 것 같고 나만 힘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울기도 많이 울고 후회도 많이 한다. 하지만 나중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뒤돌아보면 별일 아니었듯이 우리도 대충 살자. 자몽청을 만들다 손에 자몽팩을 하는 주인공처럼. 몇 개월을 뽑고 싶어 하던 미나리를 플라스틱 음료수병에다가 꽂아놓는 주인공 엄마처럼.
+) 이주란 작가의 소설을 읽고 나니 한 때 유행했던 '대충살자 시리즈'가 생각나서 최애짤을 첨부하며 리뷰를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