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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읽은 책

현대문학상 수상집_정소현, <그때 그 마음>

매년 사서 읽는 현대문학상 수상집.

올해는 정소현, <그때 그 마음이> 수상작이 되었다.
후딱 사서 읽어보고 좋은 구절과 느낀점을 써보려한다.



소설은 20대를 함께 보낸 혜성과 순정이 오랜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23년 만에 만난 둘은 서로의 처지를 비교하며 누가누가 더 바닥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나 저울질하며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그들의 곁에 있는 건 결국 서로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소설이 마무리 된다.


p. 34
"혜성은 그가 누구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누구건 상관없었다. 언젠가 그가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이 그것을 알았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그 그림을 사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 중요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살아가면서 '관계'는 아마 생존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열과 성을 다하지만 모든 결과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즉, 관계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애증의 관계. 가장 필요하지만 또 가장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관계를 포기하고 살아갈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사회적 동물, 즉 누군가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문장이 가장 와닿았던 이유는 과거 관계때문에 많은 상처를 입고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이제까지 살아온 혜성에게 '관계'(사랑의 감정)가 찾아 왔을 때의 행복함. 물론 직접적인 관계맺음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일상에 관심이 생기고 그 사람이 갔던 장소, 그 장소에서 느꼈던 감정 등이 궁금해지는 기분을 너무나도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이 찾아온 순간, 과거 특정 관계로부터 받았던 상처, 아픔 등은 싹 잊혀지고 새로운 관계에 대한 감정이 그 자리를 채워주는 듯한 느낌이 문장 내 가득차있어 내가 마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p. 48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도, 사랑으로 가득 찼던 것도 처음인 것 같았어. 한동안 그 생각으로 좋았는데 왠지 우습네. 생각해보면 나한테 그런 날은 없었던 것 같아."

"그런 날이 왜 없었겠어? 나는 분명히 기억하는데."


누구나 이별을 겪고 아픔을 겪는다.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오는 이별은 더욱 지독하고 아프다. 혜성 또한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 때 내가 정말 모든 일상생활과 이제까지 지켜온 '관계'에 대한 신념을 포기할 정도로 좋아했지만 결국, 사랑했던 사람과 결국 이어지지 않았을 땐 그 사람을 사랑했던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그 사람에 대한 저주를 퍼붓기도 하며,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기도 한다. 또 다시 관계로부터 상처받은 혜성은 자조적인 말을 통해 '원래 나는 혼자였다. 그 누구도 날 사랑해 준 적이 없다.'라며 한탄한다. 혜성의 마음이 뭔지 알기에, 나 또한 그런 경험을 겪었기에(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내가 정말 신뢰했던 친구 혹은 가족) 저 대사를 읽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자칫 저런 생각을 계속하게 되면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는 타이밍에 순정은 혜성이 남에게 사랑받았던 관계로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고, 자긴 그걸 기억한다고 말해주는 저 대사는 정말 순정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20대에 짧지만 강력한 시간을 보냈던 두 친구이기에, 서로에 대해 바닥부분까진 몰라도 내 친구가 행복했던 시간이 내 기억속엔 존재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것 같다. 이 부분이 특히 더 의미 있는 이유는 소설 속에서 이 대사 이전까지는 혜성은 순정을, 순정은 혜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서로에 대해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대사로 가족, 다른 이성친구들을 잃은 둘에겐 서로밖에 남지 않았고 둘의 관계는 어떠한 관계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49
"혜성은 그런 날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까맣에 잊고 있었다. 울고 웃고 흥에 겨워 춤추던 일들이 전생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혜성은 그때의 자신에거도, 그 이후의 자신에게도 그런 마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긴 세월 아무리 도려내버리려 노력했음에도 자신의 고통이 그 자리에 살아 있든 사랑 또한 그 자리에 살아 있음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그것이 분명 있었다는 사실만은 변함없음을 혜성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와의 이별은 힘들다. 보통 이별을 겪으면 그 사람과의 시간, 추억을 부정하며 모든 것을 지우려 노력한다. 사진을 지우고 편지를 버리고 그 사람이 준 선물도 다 버린다. 아니 어쩌면 혜성의 말처럼 도려내버리려 노력한다는 말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노력한 들 내가 그 사람과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고 했던 시간,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마지 닥터스트레인지가 마법을 쓰듯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나도 이제 누군가를 힘껏 사랑했던 그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냥 그 사람과 나는 인연이 아니었다고, 잠시 스쳐갈 뿐 평생 함께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였다고 말이다. 사랑을 통해서 나에게 어떠한 가치관이 확립되고, 또 그걸로 얻는 무언가가 있었다면(그것이 아주 사소할지라도) 그걸로 값진 사랑을 했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어쩌면 꼭 무언가 확립되고 얻는 것이 없었어도 그냥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던 존재라는 것, 누군가의 인생에서 잠시나마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느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은 값진 경험이 아닐까?